전시정보
들어가며 동일한 물질을 둘러싼 서로 다른 위치(stance)가 어떻게 그것의 물질성을 변용시켰는가. 이에 대한 탐구는 단순한 재료 연구를 넘어, "지각·가치판단·사회적 맥락이 물질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확장된다. 물질의 속성은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맥락에 따라 그 성질이 다양한 형상으로 관찰된다. 작업은 내가 주시하는 관점과 상상력의 형태를 피우는 과정이다. THIRD SKIN 돌연 사업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5년 차에 접어들면서 한편에 모아둔 폐가죽이 한 평 공간을 다 채울 즈음에 든 묘한 의구심도 한몫했다. 사업이 성장하면서 가죽을 쓰는 양도 늘었고, 필연적으로 폐기되는 양도 늘어났다. 필요한 두께로 가공하면서 메인 표면인 외피만 남기고 내피는 폐기된다. 상처나 오염, 크랙, 주름 등 제품에 담기면 안 되는 부위와 재단하고 남은 부분들 역시 자투리가 되어 버려졌다. 가죽답지 않은 표면, 이른바 '상품성' 없는 가죽은 더 이상 '가죽'이 아니었다. 오랜 인류의 역사 동안 구축돼 온 가죽의 고급스러움은 기호의 표면으로 다져졌고, 그 상징성 자체가 이 산업을 지탱하는 장치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처음 조각이라는 매체를 접하면서 개인지 사유를 드러낼 때를 떠올려보면, 재료와 형상은 늘 나를 둘러싼 것들로부터 연관됐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하던 건설 현장에서 본 도시 풍경과 이면은 어릴 적부터 도시 애호가였던 나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이상을 좇고자 하는 욕망과 실패를 예견하는 허탈함 사이에서 온전한 나의 것을 추구하고자, 존재감을 내뿜는 구조물 외형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도시 구조물을 모티브로 하여 구축하는 조각 작업은 나에게 단순히 실제 건물 자체가 아닌, 그것이 상징하는 안정성, 견고성과 화려함, 그리고 존재의 확고함에 대한 무의식적 선망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도시의 상징성은 나의 조형 언어 안에서 하나의 기호적 재료가 되어 다양한 형상으로 드러나길 반복했다. 작업은 이렇듯 삶의 현장에서 나와 맞닿거나 손에 쥐어진 것을 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가죽'을 재료로 보기 시작하는 것도 그러한 지점에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산업 현장 한가운데서 다룬 가죽 표면은 소재에 불과했다. 이후 동물과 제품, 유통, 문화, 생산과 폐기 등 이율배반과 이해관계로 얽힌 구조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소재라기보다는 인간 활동의 자취를 고스란히 담아낸 흔적이었다. 내가 주시하는 가죽은 물성의 측면을 넘어 산업 자본•문화 등 다층적 관계망 속에서 '지속가능성'이라는 공통된 화두 아래에 놓인 물질'이었다. 살아 숨 쉴 때의 살갗을 첫 번째 피부로 본다면 산업과 자본적 대상으로 소비될 때의 표면을 두 번째 피부라고 볼 수 있다. 사회는 이 두 가지 표면 사이에서 환경 측면으로, 또 윤리적으로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중심에 둔 채 수많은 논의를 나누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화학적 합성 물질이 지속 가능한 대체제 명목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대체제인가에 대한 합의는 가속화된 소비 사회에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다. 결국 인간 중심에서의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는 또다시 새로운 물질의 생성과 폐기로 소비되고 만다. 나는 이러한 순환 속에서 부산물로 그 흔적을 남기며 끊임없이 생성되고 폐기되기를 반복하는 물질을 '세 번째 피부'라 명명하기로 한다. 상징과 소비의 맥락에서 이탈한 물질로 놓인 세 번째 피부가 몸체를 갖춘다면 어떤 형태일까. 나는 가능성이 부재한 표면에 뼈대를 갖추고 직립할 수 있는 몸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주변에 존재하는 동식물을 비롯한 생명체의 형태와 주관적으로 떠올리는 안정적 구조를 복합적으로 상상한다. 뚜렷한 대상이 가진 표면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피부가 독립할 수 있는 형태를 떠올리고자 주변의 다양한 실재를 살핀다. 나는 유연한 동시에 연약한 물성과 조각난 채로 널려진 표면의 윤곽을 나름의 기법을 통해 부피를 갖추고 자의적으로 뻗어나가는 물질의 몸체를 형상한다. 이러한 조형적 시도 안에서 세워지는 세 번째 피부의 몸체는, 내 지각의 변화만큼 이전에 다뤄오던 재료와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자,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상상하는 과정이다. *출처 및 제공: 다이브 서울